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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소는 부와 권력을 가져다주는 신성의 대상인 동시에 가장 선호하는 탐식의 대상이기도 했다. 나라에서 신성시되고 농우(農牛)로 활용하며 귀한 대접을 받던 소는 어떻게 한국인의 식탁에 오르게 되었을까? 신성의 대상과 탐식의 대상 사이를 오가며 조선의 역사와 문화, 삶에 깊숙이 개입한 소와 소고기의 역사를 살펴보는 최초의 책이다.

작가
김동진,
발매
2018.04.13
브랜드
[위즈덤하우스]
분야
[역사/인문/과학]
페이지
264p
크기
145*210mm
가격
15,000원
ISBN
9791162203538
  • 교보문고
  • YES24
  • 인터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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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언제부터 농업의 근간이던 소를 식욕의 대상으로 삼았을까?

소를 통해 살펴보는 조선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 삶 이야기

농업을 근본으로 하던 조선시대에 소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소 한 마리의 노동력을 사람이 대신하려면 적게는 다섯에서 많게는 십여 명까지 달라붙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집안에 소가 몇 마리 있느냐에 따라 삶의 질이 달라졌다. 이토록 소가 중요한 요소이기에 나라에서는 국용 소를 길러 백성에게 이바지하려 했고, 백성 스스로도 소를 기르는 데 최선을 다했다. 소의 수가 곧 국력인 시대였다.

동시에 조선에서 소는 탐식의 대상이었다. 귀한 가축인 소를 수시로 잡아 잔치를 벌이고, 인구가 약 1,500만 명밖에 안 되는 17세기 후반에도 하루에 1,000여 마리씩 도살했다고 한다. 나라에서 수시로 우금령(牛禁令)을 내려 소 도살을 엄격히 단속했음에도 조선 사람들의 소고기 사랑은 그칠 줄 몰랐다. 이 책은 소를 번식시키기 위한 조선의 갖은 노력과 동시에 소의 고기를 향한 끊임없는 탐식을 다양한 역사적 사료를 통해 살펴본다.

 

국왕과 엘리트의 뱃속부터 주머니까지 책임진 든든한 먹거리

조선을 움직인 동력은 바로 소고기였다!

소고기는 국왕부터 백성까지, 조선 사람들의 삶 속 어디에나 있었다. 임금이 되려는 자, 임금을 대리하는 자, 임금은 반드시 소고기를 먹었다. 소고기는 국왕 품격의 상징이기도 해서, 나라의 허락 없이 소고기를 먹는 자는 왕위 찬탈을 모의하는 반역자로 판단해 벌을 내리기도 했다. 명종(明宗) 때 사람인 박세번(朴世蕃)은 왕이 즉위한 초기에 사직동에 사는 무인들과 작당하고 소를 잡았다가 반역의 흔적이 있다는 이유로 처단되었다. 조선 전기의 무신인 남(南怡)는 병약한 몸을 보하기 위해 소고기를 먹다가 국상 중이라는 이유로 체포당했다. 당시 그의 집 부엌에는 소고기가 수십 근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소고기는 조선시대 엘리트 집단인 성균관 유생들에게 빠질 수 없는 일상의 먹을거리였다. 성균관 유생들은 공부로 지친 몸과 마음을 소고기로 달랬다. 나라에서도 그들이 소고기를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을 썼다. 서울 도성 내에 유일하게 소 도축을 허가한 장소가 바로 성균관이었던 것이다. 유생에게 제공하고 남은 소고기는 현방懸房이라는 소고기 판매시장을 통해 일반에게 판매되었다. 이렇게 판매된 소고기는 성균관 유생들을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하고, 국가기관을 운영하는 비용으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백성들도 소고기를 배불리 먹었을까?

나라의 단속도 막을 수 없던 소고기 탐닉사()

흔히 임금과 사대부들은 소고기를 배불리 먹었어도, 가난한 백성들은 쉽게 즐기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식과 다르게 역사는 백성들 역시 소고기 잔치를 열기 바빴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세종 7(1425) 실록에 따르면 귀신에게 제사하고, 또 손님을 대접하는 데 쓰거나 먹기 위해 끊임없이 소를 잡는데, 1년 동안 잡은 소가 수천 마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목숨만큼 귀하게 여기던 제사에 언제나 소고기를 올렸고, , 단오, 추석, 동지 등 명절마다 소를 잡아 소고기를 마음껏 즐겼다. 영조 51(1775)에는 명절에 도축한 소만 해도 2만에서 3만 마리에 이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처럼 소 도살이 줄지 않는 까닭은 당시에 항상 소고기 소비처가 있었고, 조선시대가 소고기를 먹고 접대하는 문화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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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진

1987년 역사연구에 뜻을 두고 매진하기 시작한 이래 30여 년을 보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한 후 동 대학원에서 16세기 성주와 임천지역의 관둔답官屯畓 경영으로 석사학위, 조선전기 포호정책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교원대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고, 서울대 BK부교수, 한국생태환경사학회 회장 등을 지냈다. 지금은 귀농한 뒤 조선시대 농서를 다시 읽으며, 사람의 몸을 고칠 수 있는 풀과 작물을 재배하는 별빛생태농원 대표로 있다. 농약을 적게 쓰는 생태적 농법의 가능성을 살피며, 한국생태환경사에서 쟁점이 되는 여러 문제에 대해 실험하며 관찰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조선의 생태환경사, 조선전기 포호정책 연구, 한 권으로 보는 그림 세계사 백과(공저), 아틀라스 한국사(공저) 등이 있다. 조선의 생태환경사2017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 58회 한국출판문화상 저술(학술)부문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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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를 보유한 농민이 부자인 까닭은 농사에서 소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이다. 소는 농사의 성패를 가를 정도로 절대적으로 중요한 요소였다. 소 한 마리가 가는 논과 밭을 사람이 대신하려면 적어도 여덟아홉 명에서 10여 명까지 달라붙어야 했다. 더구나 소는 며칠 동안 쉬지 않고 논밭을 갈 수 있지만, 사람은 한 나절 만에 탈이 나기 일쑤다. 따라서 세종 29, 형조에서는 경기도 백성 가운데 논밭을 가는 데 소를 사용하는 자가 열에 한둘이 되지 못하는 바람에 깊이 갈 수 없어 실농한다고 했다. 소가 없다는 것은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다는 뜻이고, 이는 가을이 되어도 추수할 곡식이 없다는 의미였다. _ 27, 1_조선에서 기르던 소는 몇 마리였을까?

 

소 사육이 늘고, 소고기 식용이 일상화하면서 부위별로 소고기를 사용하는 법이 실록에 기록되기 시작한다. 특히 연산군燕山君은 소고기의 다양한 부위를 먹은 인물로 이름을 날렸다. 지라[]와 콩팥[]를 각 한 부씩 사용하고,9 우심적牛心炙이라 부르는 심장을 구워 먹거나, 육즙을 내 먹었다고 했다.10 또한 찐 송아지[蒸牛兒]를 내리면서 소고기를 제사에 바치는 희생뿐 아니라 일상적인 음식으로 먹는 것이 편리하다는 전교도 내렸다.11 이처럼 다양한 소고기 부위를 가려 즐길 줄 알던 연산군은 소고기를 일상 음식으로 먹자고 제안한 첫 번째 국왕이 되었다. _ 37, 2_소고기, 누가 얼마나 먹었소?

 

관직에 있는 양반 사대부들이 소고기를 즐기는 계기는 공부로 지친 몸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나라에서 소고기를 먹인 데서 출발한 것이기도 했다. 성균관은 반궁泮宮이라 불리었고, 안향安珦이 기증한 노비의 후손들이 성균관의 경제적인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도성 내에서 소고기를 팔아 거둔 이익으로 성균관을 뒷바라지했다. 성균관은 유생에게 소고기 반찬을 마련해야 한다는 이유로 도성 내에서 유일하게 소 도축이 허용된 장소였다. (중략) 이처럼 유생에게 소고기는 빠뜨릴 수 없는 일상의 먹을거리였다. _ 41, 2_소고기, 누가 얼마나 먹었소?

 

병자호란을 전후로 심양에서 조선으로 전파된 우역은 독성이 매우 강하고 전염이 잘되었다. 우역에 걸리면 소의 90퍼센트 이상 죽었고, 아무리 잘 대응해도 절반 이상은 살리기 어려웠다. 우역의 맹독성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그 공포가 다시 소를 죽였다. 심지어 우역이 발생했다는 소문만으로도 농민들은 소 기르기를 포기하고 도축한 뒤 소고기 잔치를 벌였다. 병에 걸려 죽이느니, 소가 건강할 때 잡아 맛난 소고기를 먹기 위한 것이었다. 심지어 우역이 지나간 후 살아남은 소들도 죽었다.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에게 마지막 남은 먹을거리가 소였기 때문이다. _ 111, 6_소고기를 먹는 특별한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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